다수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또는 많은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다가 혼자 소외된 느낌을 받아본 적도 있을 거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대부분이 맞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엔 그 다수의 판단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믿음이 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드는 의문, 혹시 내가 예민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은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도 모릅니다.

‘다수’의 결정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오히려 삶의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문제의식일 수 있습니다. ‘소수자’나 ‘소외된 입장’에 놓인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그런 의심을 품게 되는 경향은 있지만, 그것이 곧 소수자의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수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 안에 담긴 통찰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시선이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판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다수를 향한 불신, 단순한 피해의식?
‘다수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꺼내면, 종종 ‘그건 피해의식 아니냐’는 반응이 따라옵니다. 겉보기엔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소수자나 기존 질서에서 밀려난 사람은 사회적 불신을 더 자주 경험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불신이 ‘피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건, 정당한 의문 제기를 가볍게 치부하는 셈입니다.
피해의식이라는 단어가 던지는 그림자
‘피해의식’이라는 말은 듣는 순간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생각을 좁힙니다. 어떤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이나 타당성을 무시한 채, 단지 감정적 과잉으로 치부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다수에 대한 불신’은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신중한 결론일 수 있습니다.
‘믿었다가 실망한 경험’, ‘다수의 판단이 늘 정답은 아니었다는 사례들’, ‘질문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자란 불편함’ 등은 모두 비판적 인식을 키워주는 요소입니다. 예컨대 한 사람이 학교나 조직에서 줄곧 소수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배제되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다면, 그가 다수의 선택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 경험은 ‘피해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감각’이 됩니다.
다수는 언제든 틀릴 수 있다
역사는 다수가 틀렸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한국 사회의 집단 왕따 문화, 조작된 뉴스에 대중이 휩쓸리는 현상까지, 모두 ‘다수의 판단’이 윤리나 진실과 충돌했던 사례입니다. 일례로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대중은 정부의 ‘대량 살상무기’ 주장에 쉽게 동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허위 정보였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습니다. 그때 ‘소수의 비판자들’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로 봤던 시선은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또한, 학교나 직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부당함을 감지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자주 묵살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목소리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다수는 틀릴 수 있다’는 인식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감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감각을 가진 사람이 겪는 불신은, 고립이 아닌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비판적 태도와 불신은 다르지 않아
‘다수를 믿지 않는다’는 태도는, 사실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해서 의심 없이 따르지 않는 자세, 그 안에는 문제를 들여다보는 훈련이 자리합니다.
모든 사회는 불신을 통해 거듭 진보해 왔습니다. 과학도, 민주주의도, 예술도 기존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에서 출발했습니다. 따라서 다수를 향한 불신은 ‘상처’라기보다는 ‘생각’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불신이 어떤 맥락과 방식으로 드러나느냐입니다. 비난과 분열로 이어지는 불신은 경계해야 하지만, 깊은 질문으로 향하는 불신은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다수가 늘 옳다’는 전제가 너무 당연시되는 지금, 이런 비판적 감각은 더욱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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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다수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은, 누군가의 상처에서 나온 탄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통찰이 담긴 판단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 판단에 대해 피해의식이라는 단순한 틀로 해석하기보다는, 더 복합적이고 성숙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라, 질문하고 검토하는 감각입니다. 다수의 말일수록 다시 한 번, ‘정말 그런가?’ 되묻는 태도. 그 감각이 결국 나를 지키고, 더 큰 정의에 닿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런 시선을 가졌기에, 이 글에 끌렸을지 모릅니다. 그 감각을 놓치지 마세요.
관련 FAQ
다수를 믿지 못하는 건 제가 이상한 걸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건 오히려 생각이 독립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데 문제가 있는 건가요?
반대 의견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능력입니다. 반복된다면, 왜 그런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습니다.
다수의 의견에 늘 반감을 느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신보다는 질문의 방향으로 돌려보세요. 반감을 표현하기보다 분석하는 태도가 더 건강합니다.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을 들어요. 무시해도 될까요?
상대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 먼저 살펴보세요. 그 후 무시할지 말지를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비판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태도는 어떻게 다른가요?
비판은 더 나은 방향을 위한 분석이고, 부정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태도입니다. 목적이 다릅니다.
다수의 의견이 틀리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다만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립니다.
소수 의견이 옳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수 의견도 틀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수든, 소수든 검토할 수 있는 여지입니다.
다수와 다른 생각일 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공감 가능한 언어와 맥락을 찾아 이야기해 보세요. 감정이 아닌 질문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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